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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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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토의 난은 2000년, 모리 요시로 내각의 낮은 지지율과 자민당 내 파벌 갈등이 심화되면서 가토 고이치가 모리 내각 불신임안을 추진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가토는 오부치 게이조의 후임 총재 자리를 노렸으나, 모리 요시로가 총리가 되면서 불만을 품고 불신임안 제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당내 반발과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전략적 행보, 그리고 가토 본인의 결단력 부족으로 인해 불신임안은 부결되었고, 가토는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 사건으로 자민당 내 파벌 구도가 재편되었으며,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집권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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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의 난

2. 원인

오부치 게이조 내각 당시 자유민주당 내에서는 파벌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가토 고이치는 오히라 마사요시의 파벌에, 야마자키 다쿠는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파벌에 속해 있었는데, 이들은 1990년대에 파벌을 승계받아 총재 후보로서 실적을 쌓고 있었다.[1] 1999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오부치는 재선을 노렸으나, 가토와 야마자키가 총재 선거에 출마하면서 오부치의 분노를 샀고, 선거에서 승리한 후 두 사람의 파벌을 철저히 냉대하여 비주류로 밀어냈다.[1]

가토는 개혁파 이미지와 당내 두 번째로 큰 파벌인 굉지회의 수장이었기에 총리에 가장 가까운 인물로 꼽혔다.[1] 오부치가 병으로 쓰러진 뒤 5인조의 밀실 회합을 통해 모리 요시로가 후임 총재로 선출되자, 가토는 조급함을 느꼈다.[1] 모리 총리는 '신의 나라 발언' 등으로 지지율이 급락했고, 2001년 제1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은 가토와 야마자키 파벌을 주류파로 포섭하려 했으나, 가토는 모리와 계속 거리를 두었다.[1]

야마사키는 가토의 맹우로서, 가토 내각을 성립시킨 다음 자신이 후임자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1] 가토는 대중 매체웹사이트 등을 통해 여론에 호소하고, 러시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 외교 현안을 안고 있는 국가에 은밀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전략을 펼쳤다.[14][1]

2. 1. 파벌 갈등 심화

1990년대부터 자유민주당 내 파벌 갈등과 권력 투쟁은 계속되었다. 가토 고이치는 오히라 마사요시의 파벌을, 야마자키 다쿠는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파벌을 각각 승계받아 총재 후보로서의 실적을 쌓고 있었다. 1999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현직 총재였던 오부치 게이조는 재선을 노렸지만, 가토와 야마자키가 총재 선거에 출마하면서 오부치의 분노를 샀다.[1] 평소 온후한 인품으로 알려진 오부치였지만, 총재 선거에서 승리한 후 두 사람의 파벌을 철저히 냉대하여 비주류로 밀어냈다.[1]

가토는 개혁파 이미지와 당내 두 번째로 큰 파벌인 굉지회의 수장이었기에 총리에 가장 가까운 인물로 꼽혔고, 오부치의 후임 총재 후보 1순위였다.[1] 오부치가 병으로 쓰러진 뒤 5인조의 밀실 회합을 통해 모리 요시로가 후임 총재로 선출되자, 가토는 모리와의 경쟁에서 패배했다고 여기고 조급함을 느꼈다.[1]

모리 총리는 '신의 나라 발언' 등으로 지지율이 급락했고, 2001년 제19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은 가토 파벌의 오자토 사다토시를 총무회장에, 야마자키 파벌의 야스오카 오키하루를 법무대신에 기용하는 등 두 파벌을 주류파로 포섭하려 했다.[1] 그러나 가토는 모리와 계속 거리를 두었다.[1]

야마자키는 가토의 맹우로서, 가토 내각을 성립시킨 다음 자신이 후임자가 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기에 가토를 뒷받침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1]

2. 2. 모리 내각의 낮은 지지율

오부치 게이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5인조의 밀실 회합을 통해 총리가 된 모리 요시로는 낮은 지지율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신의 나라 발언' 등 모리 총리의 실언과 나카가와 히데나오 내각관방장관의 스캔들로 인해 지지율은 더욱 급락했다. 이러한 상황은 2001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으며, 1998년 참의원 선거 패배에 이어 또다시 참의원에서 과반수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자민당 집행부는 가토 고이치 파벌인 오자토 사다토시를 총무회장에 기용하고, 야마사키 다쿠 파벌인 야스오카 오키하루법무대신으로 입각시키는 등 이들을 주류파로 포섭하려 했으나, 가토는 모리와의 경제·재정 정책 차이로 인해 거리를 두었다. 이처럼 낮은 지지율과 당내 갈등은 가토의 난 발생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2. 3. 가토의 조급함과 전략

모리 요시로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려는 가토 고이치는 조급함을 느꼈다. 그는 대중 매체웹사이트 등을 통해 여론에 호소하는 전략을 채택하여 국민들의 폭넓은 관심을 모았다. 불신임안이 제출된 날 밤, 관련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한 뉴스 등은 모두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이자카야와 대중목욕탕 이용자가 평소보다 줄어들 정도로 큰 관심을 받았다. 또한 인터넷 전자 게시판2채널 이용자를 뜻하는 2채널러임을 스스로 공언하기도 했다.[14]

가토는 러시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 외교 현안을 안고 있는 국가에 측근을 통해 은밀히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모리 정권이 붕괴하고 가토 정권이 탄생할 것이니 모리와는 협상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모리는 "아무리 정쟁이라 해도 외교의 세계에서 해선 안 될 일과 해도 되는 일을 구분하는 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가토 사이에는 이 선이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1]

3. 전개

2000년 (헤이세이 12년) 11월 20일 중의원 본회의를 앞두고, 야당모리 내각에 대한 내각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가토 고이치(홍지회 회장)와 그의 동지인 국회의원들이 찬성 또는 결석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가토의 맹우인 야마자키 타쿠(근미래정치연구회 회장)가 야마자키 파벌로서 동조할 태세를 보였다.

당시 중의원 의석은 여당이 480석 중 272석을 차지하여 과반수를 31석 웃돌았지만, 가토 파벌(45명)과 야마자키 파벌(19명)의 총 64명이 반란하면 내각 불신임안이 가결되어 모리 내각은 내각총사직 또는 중의원 해산을 면치 못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 발언은 가토 파벌의 자민당으로부터의 독립, 정계 재편 등 다양한 억측을 불러일으켰다.

당 간사장노나카 히로무에 의한 당내 단속으로 가토의 기도는 실패했지만, 자민당 내의 혼란은 모리 정권의 쇠퇴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당시 가토는 개혁파 이미지가 강했고, 총리가 되기를 바라는 정치인 랭킹 등에서도 상위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당내 2위 세력을 가진 파벌의 보수 본류인 고치카이의 회장이자, 'YKK의 장남'으로서 총재 후보의 유력 주자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비주류 파가 계속 탄압받고, 활로를 찾을 수 없는 가운데 오부치 게이조가 급서하고, 이른바 5인조에 의해 불투명한 형태로 모리 총리가 탄생한다.

모리와의 경쟁에서 뒤처진 가토의 초조함이 극에 달하는 한편, 모리 내각은 신의 나라 발언, 나카가와 히데나오 내각관방장관의 스캔들로 인한 사임 등으로 내각 지지율이 저조한 상태를 유지하며, 인기가 최고조로 하락했다.

지지율이 낮은 모리 내각 상태로 2001년 참의원 선거에 돌입하면, 자민당이 참패할 것이 예상되었다.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하여 비개선 의원과 합치면 여당은 참의원 의석 과반수에 미달(교착 국회)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한때 집행부도 가토·야마자키를 주류로 끌어들이려 했고, 모리 내각에서는 이전 인사에서 가토 파·야마자키 파의 요구였던 오사토 사다토시의 총무 회장 기용과, 야스오카 고지의 입각을 실현시켰다. 그러나 모리와의 경제·재정 정책이 결정적으로 다른 가토에게는, 이러한 인사가 자신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지므로, 모리와 거리를 두었다.

가토는 대중 매체나 웹사이트 등을 통해 여론에 호소하는 전술을 채택하여 널리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불신임안 제출 당일 밤에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한 뉴스 프로그램 등이 일제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택시, 선술집, 목욕탕 등은 이용자가 평소에 비해 격감할 정도로 세상의 관심을 끌었다. 가토 자신은 서적물에 실린 2ch(2채널) 관련 기사 등에서 2ch 유저임을 공언하고 있다.

가토는 일본과 외교상 현안을 안고 있는 러시아나 북한 등 외국 수뇌부 측근에게 사자를 몰래 보내 "모리 정권은 붕괴하고, 가토 정권이 탄생할 것이니 모리 총리와 협상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전달했다[1]。이에 대해 모리는 "아무리 정쟁이라고 해도, 외교의 세계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해도 좋은 일의 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선에 대해 나와 가토는 다른 것 같다"라고 말했다[2]

언론과 세상은 불신임안 부결에 이르자 가토가 자민당을 이탈하여 민주당에 합류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가토는 자민당에 남아 당내 개혁을 꾀하겠다고 주장했다.

; 의사 표명 시

: "모리 총리에게 개조는 시키지 않겠다."

: 11월 9일 밤, 도라노몬의 호텔 오쿠라 도쿄 내 일본 요리점 "야마사토"에서 정치 평론가들과 회합했을 때 내각 개조 이야기가 나오자, 가토는 내각 타도를 선언했다. 이 발언에서 가토의 난이 시작되었다.

: 내각관방참여였던 나카무라가 가토의 타도 내각 선언을 바로 모리 총리에게 전했다.[3]

; 난 발생 후

: "제 휴대폰에는 간 씨의 전화번호가 있습니다."

: 간 나오토하토야마 유키오와의 밀접한 관계를 언론에 열심히 어필했다.

; 표결 직전

: "이제부터 긴 드라마가 시작됩니다."

: "100% 이길 수 있지만, 이번에 저는 총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은 고노 씨(고노 요헤이외상)일지도 모른다"

: (17일 새벽에 무너뜨리기 위한 다수파 공작이 시작되었던 시점에서 측근 의원에게 전화)

; 난 이후

: "나(가토)는 자민당 내부에서의 변혁을 원했고, 국민은 자민당을 넘어서는 정계의 변혁을 원했다. 이것이 큰 오산이었다"

이 소동에서 가토는 해프닝 해산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히라 내각 당시 가토는 내각관방 부장관을 맡고 있었고, 총리 관저 내에서 이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히라는 가토파의 근원인 오히라파의 영수였으며, 이에 반기를 든 후쿠다파는 훗날 모리가 이끈 모리파의 근원이었다. 즉, 가토의 난과는 정반대의 입장에서의 정국이었다.

11월 11일 밤, 도쿄 기오이초의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열린 주류 5개 파벌의 회합에서 "가토는 뜨거운 프라이팬 위에서 고양이 춤을 추게 하면 된다"고 발언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중의원 본회의장에서 이 건에 대해 가토로부터 상담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고이즈미는 "나였다면 더 빨리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가토는 고이즈미의 지지(최소한 개인적 지지)를 얻었다고 해석하는 시각이 있었다.

일부 언론은, 가토, 야마자키와 함께 YKK로 불리던 고이즈미가, 모리파의 일부 의원들과 함께 탈당하여, 가토와 합류하는 경우에 대해 보도했지만 현실성은 희박했다.

당내 국회의원에게 동조자가 확산되지 않고, 베테랑 의원들 중 보수 본류를 자처하는 자파가 당을 분열시키거나 야당의 불신임안에 동조한다는 금지된 수단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있는 가운데, 노나카를 중심으로 하는 집행부가 제명을 강경하게 주장하며 와해된 결과, 고자토 사다토시 총무회장의 설득을 받아들여 결석 전술로 전환했다. 이를 가토는 눈물을 흘리며 "명예로운 철수"라고 불렀다.

가토 파벌이 와해되어 패배를 확신한 가토, 야마자키가 양 파벌 합동 총회를 열어 그 후의 대응을 협의하는 장면의 일부가 그대로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회합은 오후 9시 30분부터 호텔 오쿠라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도중에 가토, 야마자키 두 사람이 단독으로 의사당에서 불신임표를 던지러 가겠다고 발언한다. 자신이 일으킨 타도 운동으로 인해 당에서 제명당하더라도 한 명의 의원으로서 최종적인 책임을 완수하고, 한편으로는 자신들을 따랐던 의원들의 당 제명을 막고 비주류로서 냉대받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선언하고 본회의장으로 향하려는 가토의 어깨를 가토 파벌의 야가키 사다카즈가 붙잡고 "'''가토 선생님은 대장이니까요! 혼자 돌격하는 건 안 돼요! 가토 선생님이 움직일 때는 우리들도 따라갈 테니까요!'''"라고 필사적으로 만류했다[8]. 또한, 같은 가토 파벌의 스기야마 노리오도 가토의 옆에서 야가키의 발언에 끄덕이며 "'''죽든 살든 함께다'''"라고 만류했다.

측근들의 눈물 어린 설득에 가토는 얼굴을 붉히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를 악물고 멈춰 섰다. 남은 가토, 야마자키 파벌의 의원들은 전원 결석하는 것으로 확인하고, 파벌의 결속력을 확인했다고 이해되고 있다.

인상적인 이 장면은 가토의 난을 회고할 경우, 그 좌절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반드시 사용되는 것이며, 야가키 사다카즈의 인물 소개에서도 빠질 수 없는 영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후, 본회의는 마쓰나미 겐시로 의원이 어떤 의원석을 향해 연단에서 물컵의 물을 끼얹는 사건[9]이 발생하여 내각 불신임안의 표결은 다음 날 오전 4시 가까이 소요되었다. 가토와 야마자키는 파벌 총회에서는 결석을 결정하지 않았다. 가토와 야마자키가 국회로 향해 도착한 곳에서 가토가 약해져 호텔로 되돌아갔다. 게다가 호텔로 돌아가는 도중 정치평론가야노 준야로부터 야마자키에게 전화가 걸려와 "결석하면 두 사람 모두 정치 생명을 잃는다"는 말을 듣고 다시 국회로 향했지만, 또다시 가토의 마음이 꺾여 호텔 방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호텔에서 가토가 국회에 갈 것을 주장하고 야마자키는 거절하여 가토가 혼자 국회로 향했지만, 세 번이나 호텔로 돌아갔다[10].

3. 1. 불신임안 제출 움직임

2000년 11월, NHK의 일요 토론에 출연한 가토 고이치는 지지율이 낮고 비지지율이 70%에 달하는 모리 요시로 내각에 대해 "국민의 70%가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내각에 대해 불신임 결의에 반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민당원이라도 찬성할 수도 있다"라고 발언하여 사실상 반란을 예고했다.[1] 이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자유당 당수 오자와 이치로는 11월 17일(금요일)에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할 것을 민주당 대표 하토야마 유키오에게 제안했다. 이는 주말 동안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후원자들로부터 불신임안에 대한 대응을 재고해 달라는 설득을 받을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토는 주말에 오히려 파벌 내 의원들을 설득하겠다고 주장했고, 하토야마는 11월 20일(월요일)에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결과적으로 주말 동안 가토파 의원들의 절반은 가토와 결별하게 되었다.

야마자키파 소속 야스오카 오키하루 법무대신과 가토파 소속 모리타 하지메 운수대신은 가토와 야마자키의 도각(모리 내각 타도)에 노골적으로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은 가토·야마자키 양 파가 내각 불신임안에 찬성하기로 최종 결정할 경우, 모리 요시로 총리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불신임 투표를 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었다. 과거 1993년 거짓말 해산 당시 내각 불신임 결의 채택에서 2명의 각료가 사표를 제출한 후 불신임 투표를 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가토·야마자키파가 결석 전술로 전환하면서 야스오카와 모리타는 출석하여 신임 투표를 했다. 가토파 소속 요시카와 요시오 노동대신은 참의원 의원이었기 때문에 중의원의 내각 불신임 채택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가토의 난에는 반대하는 의향을 보였다.

가토는 가토파의 일부 이탈은 예상했지만, 불신임안을 부결시킬 인원까지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3. 2. YKK의 분열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YKK( 야마자키 다쿠, 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일원으로서 가토와 친분이 있었지만, '가토의 난' 과정에서 가토를 배신하고 노나카 히로무와 손을 잡았다. 고이즈미는 가토가 내각불신임안에 찬성한다는 정보를 언론과 노나카 등 당내 실력자들에게 흘렸고, 가토파와 야마자키파를 회유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15]

이는 표면적으로는 정책적 대립으로 인한 선택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고이즈미는 모리 파벌의 회장으로서 "정책의 고이즈미에서 정국의 고이즈미로 변모한다"고 선언하며, 노나카 등 당내 실력자들과 연계하여 가토파와 야마자키파, 그리고 젊은 의원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아 불신임안에 반대했다.

이후 YKK가 처음으로 동석한 파티에서 고이즈미는 "YKK는 우정과 타산의 이중 구조"라고 발언하여, 가토와 야마자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훗날 가토와 야마자키는 고이즈미의 정치적 기반이 YKK가 아닌 후쿠다 다케오에 있으며, 모리파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정치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3. 3. 자민당 집행부의 대응

노나카 히로무를 중심으로 한 자민당 집행부는 가토파 붕괴를 위해 공천권을 적극 활용했다. 내각불신임안 표결 전, 불신임안에 찬성하거나 불참한 의원들에게는 공천을 하지 않거나 제명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15] 소선거구제 하에서는 제3당이나 무소속 후보의 당선이 어렵기 때문에, 이는 가토파 의원들에게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정책적으로 노나카와 대립했지만, YKK 동료였던 가토 대신 노나카와 손을 잡았다. 고이즈미는 가토에게 불신임안에 대한 지지를 약속했지만, 실제로는 노나카 등 당내 실력자들에게 가토가 불신임안에 찬성할 것이라는 정보를 흘리며 가토파와 야마사키파를 회유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불신임안 표결 직전, 자민당 집행부는 가토와 야마사키에게 제명을 통보하여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결국 미야자와 기이치가 가토와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가토파는 붕괴되기 시작했다.[15] 가토의 최측근이었던 니와 유야고가 마코토마저 가토에게 등을 돌리면서 가토의 전략은 실패로 끝났다.[16]

노나카는 과거 가토를 총리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던 인물이었지만, 1999년 가토가 오부치 게이조에게 저항하는 형태로 총재 선거에 출마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 노나카는 가토와 친하다는 이유로 관방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후 가토와 대립하게 되었다.

집행부는 가토의 동조자에 대한 붕괴 수단으로 공천권을 최대한 활용했다.[7] 노나카는 내각 불신임안이 가결될 경우 모리 요시로 내각에 해산 총선거를 요구할 생각이었다. 노나카는 2000년 11월 17일에 도도부현 연합에 총선거 준비를 지시했다. 동시에 불신임안 채결에 찬성하거나 결석한 의원은 제명하거나 공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또한, 소선거구 지부장의 "교체", 즉 대립 후보 옹립도 생각했다고 한다.[7]

붕괴 작업 막바지에는 가토와 야마사키에게 제명장을 내용증명 우편으로 보내는 등 철저하게 제명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3. 4. 가토와 야마자키의 번복

보수본류굉지회가 사실상 해당 행위를 하고, 야당이 제안한 불신임안에 자민당 일부가 동조한다는 사실 때문에 가토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커졌다. 노나카 히로무는 가토파에 대한 압박을 계속했고, 가토의 복심으로 불리던 오자토 사다토시가 가토를 설득하면서 가토는 불신임안 찬성 대신 불참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가토는 눈물을 흘리며 이를 "명예로운 철수"라고 표현했다.[17]

이후 가토와 야마사키 다쿠는 호텔 오쿠라 도쿄에서 두 파벌의 합동 총회를 열어 대응을 논의했다. 가토와 야마사키는 자신들만 불신임안에 찬성표를 던지고, 제명되더라도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다. 이는 자신들을 따랐던 의원들이 제명 등의 피해를 입지 않고 비주류파로서 냉대받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하지만 가토가 본회의장에 가려고 하자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가토의 어깨를 잡으며 "가토 선생님은 대장이니까! 혼자서 돌격한다니 안 됩니다! 가토 선생님이 움직일 때는 우리들도 따라갈 테니까요!"라며 만류했다.[8] 야마사키 파벌의 스기야마 노리오도 "죽을 때도 살 때도 함께"라며 야마사키를 만류했다.

측근들의 설득에 가토와 야마사키는 찬성표를 던지는 것을 포기했고, 다른 의원들은 모두 불참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파벌의 결속력을 확인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불신임안 표결은 마쓰나미 겐시로 의원이 연단 위에서 의원석을 향해 컵의 물을 뿌리는 사건 때문에 다음날 오전 4시로 연기되었다.[9] 이때까지도 가토와 야마사키는 파벌 소속 의원들과 달리 두 사람의 불참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었다. 두 사람은 함께 국회로 향했으나 가토는 마음이 흔들려 호텔로 돌아갔다. 정치평론가 야노 준야는 야마사키에게 전화해서 불참하면 두 사람 다 정치 생명이 끝날 거라고 충고하여 다시 국회로 갔지만, 또 마음이 꺾여 호텔로 돌아갔다. 이후 가토는 국회로 갈 것을 주장했지만 야마사키가 거절하여 가토 혼자 국회로 향했으나 결국 다시 돌아와버렸다.[10]

3. 5. 불신임안 표결 결과

불신임 결의안은 찬성 190표, 반대 237표, 불참(기권) 51표로 부결되었다.[17]

불신임안 표결 결과[17]
정당찬성반대불참(기권)
민주당127명1명
자유당22명
일본공산당20명
사회민주당·시민연합19명
무소속의 회1명3명
무소속1명2명2명
자유민주당192명42명
공명당31명
보수당6명1명
21세기 클럽6명3명
총계190명237명51명



자민당 내에서는 파벌에 따라 투표 성향이 달랐다.

자민당 파벌별 표결 상황[17]
파벌반대불참(기권)
헤이세이 연구회 (하시모토 류타로 파)57명2명
세이와 정책 연구회 (모리 요시로 파)39명
시스이회 (에토 다카미・카메이 시즈카 파)35명
고코회 (가토 고이치 파)24명21명
반초 정책 연구소 (구 카와모토 토시오 파)12명
대용회 (고노 요헤이 그룹)12명
근미래 정치 연구회 (야마자키 타쿠 파)2명17명
무파벌10명2명



가토 고이치와 야마자키 타쿠는 당초 불신임안에 찬성 표를 던지려 했으나, 측근들의 만류로 불참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특히 다니가키 사다카즈는 "가토 선생님은 대장이니까! 혼자서 돌격한다니 안됩니다!"라며 가토를 만류했고, 스기야마 노리오도 "죽을 때도 살 때도 함께"라며 야마자키를 만류했다.[17] 가토파와 야마자키파 의원 대부분은 불참했다.

표결 당일, 마쓰나미 겐시로 의원이 연단 위에서 의원석을 향해 컵의 물을 뿌리는 소동이 벌어져 표결이 다음날 오전 4시로 연기되기도 했다.[17]

4. 결과

당 간사장 노나카 히로무의 당내 단속으로 가토의 계획은 실패했지만, 이는 모리 정권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17]

당시 가토 고이치, 야마자키 타쿠,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자민당의 차세대 지도자 후보로 "YKK 트리오"라 불렸으나, 이 사건으로 가토와 야마자키는 큰 타격을 입었다. 결과적으로 이듬해 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당선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가토의 난 당시, 가토파 소속 모리타 하지메 운수대신과 야마사키파 소속 야스오카 법무대신은 당초 다른 의원들과 함께 불신임안에 찬성표를 던지고 사표를 제출하려 했다. 그러나 파벌 의원들이 불참으로 입장을 선회하자, 두 대신도 사표 제출을 포기했다. 가토파 소속 요시카와 요시오 노동대신은 참의원 의원이라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가토의 난에 반대했다. 이후 세 대신은 12월 개각에서 모두 해임되었다.

4. 1. 굉지회의 분열

가토의 난을 계기로 굉지회는 분열되었다. 가토 고이치와 함께 했던 하라다 쇼조우, 기시 고이치, 다니가키 사다카즈, 가와사키 지로, 아이사와 이치로 등은 가토파에 남았다. 반면, 가토의 난에 반대했던 미야자와 기이치, 스즈키 젠코, 이케다 유키히코, 호리우치 미쓰오, 고가 마코토 등은 호리우치파를 결성했다.[4] 이후 두 파벌은 2008년 다시 합쳐질 때까지 양쪽 모두 스스로를 굉지회라 부르며 경쟁했다.

가토파의 일원이었던 스가 요시히데는 난 이후 가토와 거리를 두었고, 결국 파벌을 이탈했다.[4] 기시다 후미오는 혈서를 쓰며 참가할 각오를 보였으나, 난이 진압된 후 정치적 싸움에 신중한 성격으로 바뀌었다.[5] [6]

굉지회는 다음과 같이 분열되었다.

가토파 (유린회)호리우치파 (신재정연구회)



미야자와 기이치, 스즈키 젠코, 이케다 유키히코 등 굉지회의 원류 인사들이 반대파로 돌아서면서, 굉지회의 대세는 가토의 난 반대로 기울었다. 두 그룹은 2008년 합류할 때까지 모두 굉지회를 자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4. 2. 가토파와 야마자키파의 몰락

모리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고 가토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음에도 가토는 결국 불신임안에 기권하고 자민당 탈당도 거부하면서 가토에 대한 실망감이 커졌다.[11] 호리우치파가 독립하면서 가토파는 당내 제2파벌에서 제6파벌로 전락했고, 개각을 통해 오사토 총무회장과 두 명의 각료가 물러나면서 당내 영향력도 크게 떨어졌다. 2001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모리가 물러나고 고이즈미가 집권한 뒤, 가토는 외교 상담역으로 중용되면서 존재감을 회복하는 듯 했다. 하지만 2002년 정치자금 문제로 비서가 체포되고 가토도 파벌 회장직과 의원직을 포기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은 완전히 끝나버렸다.[11]

가토파에 비해 야마사키파가 입은 피해는 작았다. 현직 각료였던 야스오카를 제외하면 이나바 야마토 한 명만 반기를 들었기에 오히려 파벌의 결속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소규모 파벌이었지만 과거 다나카파처럼 철의 단결력을 보여주어 당내에서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야마자키파는 원래 소규모 파벌이었고, 유일하게 입각했던 야스오카마저 직을 잃으면서 당내 영향력은 더욱 약해졌다. 가토파와 합친다거나 민주당에 합류한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고이즈미가 총재가 된 뒤 야마자키가 간사장, 부총재를 연이어 맡으면서 주류파로 부상했고, 이후로도 당내 영향력을 어느 정도 유지했다.

4. 3. 하시모토파의 부상과 모리파의 몰락

하시모토파는 가토의 난 진압에 앞장섰던 노나카를 중심으로 세를 과시했다. 하지만 불신임안 투표에서 몇몇 소장파 의원들이 불참하면서 철의 단결력을 자랑하던 하시모토파에 비상이 걸렸다. 이는 가토의 난에 동조할 생각은 없지만 부적절한 발언으로 지지율이 떨어지던 모리를 감싸는 것에도 동조하기 싫던 의원들의 뜻이 표출된 것이었다. 파벌 내 간부들조차 모리 내각을 앞으로도 계속 지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발언이 나왔고 실제로 가토의 난이 진압된 이후 하시모토파는 모리 내각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는 모리파의 고이즈미를 분노하게 했고 모리의 후임을 정하는 총재 선거에 고이즈미가 입후보하게 만들었다.[17]

4. 4.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집권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가토의 난 이후, YKK(야마사키 다쿠, 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 관계를 "우정과 타산의 이중 구조"라고 표현하며, 사실상 YKK 관계 청산을 선언했다.[5]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웃는 얼굴로 이 발언을 하는 고이즈미와 고뇌에 찬 표정으로 듣는 가토, 야마사키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 이는 고이즈미가 YKK보다 자신의 파벌인 모리파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5]

이듬해인 2001년, 고이즈미는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여 총리가 되었다.

5. 평가

제2차 모리 내각 불신임 결의안을 둘러싼 '가토의 난'은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유민주당 간사장이었던 노나카 히로무의 당내 단속으로 가토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자민당 내 혼란은 모리 정권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1]

가토 고이치, 야마자키 타쿠,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YKK"로 불리며 자민당의 차세대 지도자 후보로 꼽혔으나, 이 사건으로 가토와 야마자키는 큰 타격을 입었다. 결과적으로 이듬해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당선되는 복선이 되었다.[1]

가토는 대중 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여론에 호소하는 전략을 택하여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불신임안 제출 당일 밤 뉴스 프로그램들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택시, 선술집, 목욕탕 이용객이 감소할 정도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다.[1]

가토는 일본과 외교적 현안을 안고 있는 북한 등 외국 수뇌부 측근에게 몰래 특사를 보내 "모리 정권은 붕괴하고 가토 정권이 탄생할 것이니 모리 총리와 협상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1] 이에 대해 모리는 "아무리 정쟁이라고 해도 외교에는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해도 좋은 일의 선이 있다"고 비판했다.[2]

언론과 세상은 불신임안 부결 이후 가토가 자민당을 탈당하여 민주당에 합류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가토는 자민당에 남아 당내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주장했다. 이는 과거 자민당을 탈당한 세력들이 일시적인 영향력만 행사하고 정계에서 쇠퇴한 사례를 고려한 판단이었다.[1] 결국 가토는 고자토 사다토시 총무회장의 설득을 받아들여 결석 전술로 전환했고, 이를 "명예로운 철수"라고 불렀다.[1]

이 소동에서 가토는 오히라 내각 당시 해프닝 해산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가토는 당시 내각관방 부장관을 맡고 있었고, 총리 관저 내에서 이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시모토 류타로는 도쿄 기오이초의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열린 주류 5개 파벌 회합에서 "가토는 뜨거운 프라이팬 위에서 고양이 춤을 추게 하면 된다"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가토를 응원하는 측의 여론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주류파 내부에서도 저속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은 가토의 행동을 비판하며 붕괴의 선두에 섰다. 그는 가토와 야마자키에게 당 차원의 처분을 내리지 않았지만, 이는 당내에도 우국지사가 있다는 것을 모리가 이해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리가 "불신임 결의안이 부결되었는데 간사장은 뭘 말하는 건가"라고 발언한 것을 듣고 노나카는 실망하여 간사장 직을 사임했다.

미야자와 기이치는 가토의 난 이후 가토에게 원망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하마다 코이치에 따르면, 가토는 사전에 미야자와로부터 '난'에 대한 양해를 얻었거나 부추김을 받았다고 한다.

고가 마코토는 가토의 측근이었으나 돌연 가토 파벌의 대다수를 반 가토 세력으로 결집시켰다. 이로 인해 논공행상에서 노나카로부터 간사장 자리를 양보받게 되었다. 스가 요시히데는 가토파의 일원이었으나 난 이후 "시시하다"며 불만을 토로하며 가토와 거리를 두었고, 이후 파벌을 이탈했다.[4]

기시다 후미오는 가토의 난에 혈서를 써서 참가할 각오를 보였으나, 난이 진압되면서 "정치인으로서 승부를 걸 때는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싸움에 신중한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6] 자유당 당수 오자와 이치로는 가토의 난 실패 후 "남자답지 못하군"이라고 코멘트했다.

집행부는 가토의 동조자에 대한 붕괴 수단으로 공천권을 최대한 활용했다.[7] 노나카는 불신임안 채결에 찬성하거나 결석한 의원은 제명하거나 공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가토 파벌이 와해되어 패배를 확신한 가토, 야마자키가 양 파벌 합동 총회를 열어 그 후의 대응을 협의하는 장면의 일부가 그대로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야가키 사다카즈는 가토에게 "가토 선생님은 대장이니까요! 혼자 돌격하는 건 안 돼요! 가토 선생님이 움직일 때는 우리들도 따라갈 테니까요!"라고 필사적으로 만류했다.[8]

가토파·굉지회는 가토와 행동을 함께 한 그룹(가토파)과 반대한 그룹(호리우치파)으로 분열되었다. 양 그룹은 2008년에 합류할 때까지 쌍방이 굉지회를 칭하는 이상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여론의 모리 정권·자민당에 대한 지지가 극도로 낮았기 때문에, 가토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음에도 불구하고, 탈당을 거부하고 투표도 기권함으로써 오히려 가토에 대한 실망감과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가토파의 인원은 대폭 감소하여 제2파벌에서 제6파벌로 전락했다. 이듬해 고이즈미가 총리 총재로 취임하자,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 조언하는 등, 외교 경험이 부족한 고이즈미의 상담 상대로서 일정 부분 존재감을 회복했다.[11] 그러나 2002년에 정치 자금 문제가 보도되어 의원 사퇴에 몰려 총리 총재 후보에서 완전히 탈락했다.

야마자키파는 난에 참가한 것 자체에 대해 당내에서 비판을 받았지만,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과거 철의 단결을 자랑했던 다나카파를 방불케 하는 결속에 당내에서 감탄했다. 하시모토파는 난 진정에 나섰던 노나카를 중심으로 면목을 과시했다. 그러나 결의안 투표에서 젊은 피 몇 명이 기권하여 철의 단결을 자랑했던 하시모토파의 기반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모리는 가토의 난에 대한 유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2007년 후쿠다 야스오 정권의 간사장에 타니가키 사다카즈를 기용하는 것에 반대했다고 한다. 다만, 난으로부터 8년 후인 2008년 6월 9일, 가토와 회식 자리에서 "그때 폐를 끼쳤습니다"라고 사죄했고, 모리와 악수하며 화해했다.

5. 1. 일본 내 평가

제2차 모리 내각 불신임 결의안을 둘러싼 이른바 '가토의 난'은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자유민주당 간사장이었던 노나카 히로무의 당내 단속으로 가토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자민당 내 혼란은 모리 정권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1]

당시 가토 고이치, 야마자키 타쿠,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YKK"로 불리며 자민당의 차세대 지도자 후보로 꼽혔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가토와 야마자키는 큰 타격을 입었고, 결과적으로 이듬해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당선되는 계기가 되었다.[1]

가토는 대중 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여론에 호소하는 전략을 택하여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불신임안 제출 당일 밤 뉴스 프로그램들은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택시, 선술집, 목욕탕 이용객이 감소할 정도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다.[1]

그러나 가토는 자민당을 탈당하지 않고 당내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주장했다. 이는 과거 자민당을 탈당한 세력들이 일시적인 영향력만 행사하고 정계에서 쇠퇴한 사례를 고려한 판단이었다.[1]

고이즈미는 가토에게 "나였다면 더 빨리 했을 것"이라며 지지 의사를 밝혔지만, 실제로는 모리파 회장으로서 당내 실력자들과 연계하여 가토파와 야마자키파를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다.[1]

결국 가토는 고자토 사다토시 총무회장의 설득을 받아들여 결석 전술로 전환했고, 이를 "명예로운 철수"라고 불렀다.[1]

이후 하야사카 시게조는 가토의 난을 '자작극'이라고 평가하며, 가토의 리더십 부재를 비판했다.[1]

일부 언론에서는 고이즈미가 모리파 일부 의원들과 탈당하여 가토와 합류할 가능성을 보도했지만, 현실성은 낮았다. 난동 후 YKK가 처음으로 동석한 파티에서 고이즈미는 "YKK는 우정과 타산의 이중 구조"라고 발언하여, 가토, 야마자키와의 표정 대비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1]

2007년 제1차 아베 내각 불신임 결의안 제출 당시, 가토는 찬성표를 들고 단상에 올랐다가 청표로 바꿔 들어 혼란을 야기했다. 이는 단순한 착오였다고 해명했지만, "본심은 찬성이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1]

5. 2. 한국의 관점에서의 시사점

가토의 난은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이지만, 한국 정치, 특히 더불어민주당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파벌 정치의 폐해와 정치 개혁의 필요성, 건강한 정치 문화 형성이라는 과제는 한국 정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가토의 난은 파벌 간의 갈등과 분열이 어떻게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하고, 결국에는 정치인 개인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더불어민주당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사건이다. 당내 다양한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될 경우, 당의 분열은 물론이고 정권 재창출에도 실패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가토의 난은 또한 정치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낡은 정치 관행과 파벌 중심의 정치 구도는 결국 국민의 불신을 초래하고 정치 발전을 저해한다. 더불어민주당은 가토의 난을 반면교사 삼아, 보다 투명하고 개방적인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고,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가토의 난은 건강한 정치 문화 형성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정치는 단순한 권력 투쟁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봉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당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상호 존중과 협력의 문화를 정착시켜 나가야 한다. 이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6. 기타

당시 여론은 모리 정권자민당에 대한 지지가 극도로 낮아 가토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탈당을 거부하고 투표도 기권하면서 오히려 가토에 대한 실망감과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11]

가토파는 인원이 대폭 감소하여 제2파벌에서 제6파벌로 전락했고, 내각 개조와 당 간부 개편으로 가토파의 오사토 사다토시가 총무회장을 사임하고 모리타 하지메와 요시카와 요시오가 각료에서 물러나면서 가토의 당내 영향력이 크게 줄었다. 이듬해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총리 총재로 취임하자,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 조언하는 등 외교 경험이 부족한 고이즈미의 상담역으로 일정 부분 존재감을 회복했다.[11] 그러나 2002년 정치 자금 문제가 불거져 비서 체포 등으로 파벌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당을 탈당했으며, 의원직까지 사퇴하면서 총리 총재 후보에서 완전히 탈락했다.

의원 사퇴 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 자민당에 복당하여 가토파의 후계인 오사토파의 최고 고문을 맡았지만, 가토 및 오사토파의 정계 영향력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오사토파는 파벌의 간판을 미래의 총재 후보로 불렸던 다니가키 사다카즈로 교체했다. 다니가키는 소파벌 출신임에도 고이즈미 내각에서 재무상에 취임하여 포스트 고이즈미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일각에서는 가토가 타도 운동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파벌 분열 없이 제2파벌 영수 지위를 유지, 2001년 2월 에히메마루 사고를 계기로 '포스트 모리'에서 가토가 총리 총재가 되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많다.

6. 1. 언론의 반응

가토는 대중 매체나 웹사이트 등을 통해 여론에 호소하는 전술을 채택하여 널리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불신임안 제출 당일 밤에는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한 뉴스 프로그램 등이 일제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택시, 선술집, 목욕탕 등은 이용자가 평소에 비해 격감할 정도로 세상의 관심을 끌었다.[1] 가토 자신은 서적물에 실린 2ch(2채널) 관련 기사 등에서 2ch 유저임을 공언하고 있다.

NHK의 일요 토론에 출연하여, 지지율이 하락하고 비지지율이 70%에 달한 모리 요시로 내각에 대해 2000년 11월에 "국민의 70%가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내각에 대해, 불신임 결의에 반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민당원이라도 찬성할 수도 있다"라고 발언, 사실상 반란 발언으로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언론과 세상은 불신임안 부결에 이르자 가토가 자민당을 이탈하여 민주당에 합류할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가토는 자민당에 남아 어디까지나 자민당 내에서 개혁을 꾀하겠다고 주장했다.

언론은 현 내각에 대한 내각 불신임안에 동조하면서도 탈당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가토의 이론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평가했다. 가토는 "과거에 자민당을 개혁하려다가 탈당한 사람들이 종종 있었지만, 한때의 흥분만 있을 뿐, 매번 결국 에너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개혁으로 이어지지 않는 행동이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안에서 하겠다."라는 주장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6. 2. 본회의장에서의 물컵 사건

모리 내각 불신임안 결의에서 보수당을 대표하여 반대 토론을 하던 마쓰나미 겐시로는, 민주당 의원으로부터 "너, 당수(=오기 치카게)와 몇 번이나 했어?"라는 야유를 받자 격분하여 국회 단상에서 나가타 히사야스를 향해 컵의 을 뿌렸다.[12][13] (나가타는 부인하지만, 마쓰나미 본인과 다카이치 사나에가 주장하고 있다).[12][13]

물 뿌리기가 끝나자마자 항의하는 야당 의원들이 일제히 연단으로 몰려들어 대소동이 벌어졌고, 마쓰나미는 너무 큰 소리에 귀를 막으며 빠른 속도로 초고를 읽고 연단에서 내려왔다. 마쓰나미는 이 자리에서 중의원 의장으로부터 본회의장 퇴장 처분을 받았고, 중의원 징벌위원회에서 25일 등원 정지 처분을 받았다.

6. 3. 그 외의 에피소드

가토 고이치의 의사 표명 회합에 참석했던 하야사카 시게조는 이듬해 2001년 정월에 방송된 "헤이세이 일본의 밤" 스페셜에서 가토의 난에 대해 언급하며, '자작극으로 순식간에 진압되었다', '가토는 배짱이 없고, 도쿄대 법학부 출신의 좋지 않은 예'라고 가토를 혹평했다.[3]

참조

[1] 서적 交渉術 文春文庫 2011-06-10
[2] 서적 交渉術 文春文庫 2011-06-10
[3] 서적 森喜朗 自民党と政権交代 朝日新聞社 2017-10-05
[4] 뉴스 命がけの乱、負けても存在感 そして菅氏は旧敵と組んだ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20-09-18
[5] 웹사이트 ドライマティーニ密談で蘇る「加藤の乱・血判状」の記憶 自民ベテラン4人が語り合った「ポスト安倍」への夜 https://www.fnn.jp/a[...] 2020-09-19
[6] 서적 岸田ビジョンー分断から協調へ 講談社 2020-09-15
[7] 서적 首相支配--日本政治の変貌 中央公論新社 2006-05-25
[8] 웹사이트 〈加藤紘一氏死去〉保守本流 地方から問う http://www.kahoku.co[...] 河北新報 2016-09-11
[9] 웹사이트 【話の肖像画】日本体育大理事長・松浪健四郎(72)(7) https://www.sankei.c[...] 2023-12-21
[10] 서적 YKK秘録 講談社 2016-07-19
[11] 웹사이트 加藤紘一氏 第2話:「靖国問題」 / 日本の将来を提言する / 特定非営利活動法人 言論NPO https://www.genron-n[...] 2021-11-09
[12] 뉴스 話の肖像画 日本体育大理事長・松浪健四郎 https://www.sankei.c[...] 2023-03-03
[13] 웹사이트 「そんなに私が悪いのか!?」 https://www.sanae.gr[...] 衆議院議員 高市早苗 2023-03-03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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